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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예의 리더십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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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효심정치와 다산의 목민리더십

효는 경기도의 정체성이다. 이는 정조의 효심에 기반한 애민정치와 연관이 깊다. 수원시에 ‘수원화성’의 ‘봉수당(奉壽堂)’이 있고, 화성시에는 ‘효촌(孝村)’과 ‘융건릉(隆健陵)’, ‘용주사(龍珠寺)’ 등이 조성돼있으며, 능행을 통한 효심정치에 기인한다.  

정조의 효심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뒤주 안에서 8일 동안이나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구선복(具善復)과 그 병졸들의 놀림을 받으며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임오화변(壬午禍變)’ 광경을 목격하면서 잉태되었다. 아버지를 살려달라는 세손의 애원에도 영조는 “세손을 데려 가라”고 명했고, 내관 품에 안겨 울부짖는 아들을 보던 사도세자는 “세손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장차 왕이 될 사람이다.”라며 내관을 꾸짖었다. 이 사건이후 세손과 혜경궁 홍씨는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세손은 아침마다 문안편지로 어머니를 위로해드리는 등 효를 실천했다.

이후 정조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과 “죄인의 아들은 군왕이 될 수 없다.”는 ‘8자흉언[罪人之子不爲君王]’ 등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조는 25세에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일성과 함께 조선의 22대 왕에 올랐지만 즉위 원년에만 일곱 차례나 자객이 침전에 들 정도로 목숨마저 위태로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추존하려는 일도 선대왕[영조]의 유훈(遺訓)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조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기 위해 사도(思悼)세자를 장헌(莊獻)세자로, 수은묘(垂恩墓)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고, 영우원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천장(遷葬)을 단행했다.

특히 화성시의 최루백(崔婁伯) 효자비와 인근한 곳에 현륭원을 조성하면서 효촌(孝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는데, 이는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죽여서 원수를 갚았다는 내용이 정조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효 사찰인 용주사를 건립하고 아버지 산소 옆에, 어진(御眞)을 위치시켰으며, 봉수당에서 어머니 회갑연을 열어 드렸다. 또한 현륭원을 13차례나 찾아 성묘했을 뿐 아니라 부친의 문무겸전(文武兼全)을 계승하겠다는 효심으로 무인복장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효를 실천했다.

『예기』에 “가장 큰 효는 부모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다(大孝尊親).”, 『순자』에는 “효는 의를 따르는 것이지 부모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孝子從義不從父).”라고 했다. 이를 정조와 연계하면, 정조는 의(義)와 부친의 뜻을 따르는, 이른바 ‘계지술사(繼志述事)’의 효를 실천했다. 훗날 다산은 능행차 과정에서 보았던 정조의 깊은 효심에 감명 받아 “효는 부모의 뜻을 섬기는데 있다(孝在於養志)”라고 적었다.

정조의 효심정치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개혁적이었다. 첫째, 능행차에서 관광민인(觀光民人)들과 소통한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이다. 능행차를 구경나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면서 글을 아는 자는 상언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징과 꽹과리로 격쟁을 해서 66회 능행차 동안 무려 3,550건을 해결해 주었다. 흑산도에서 올라와 닥나무 세금 문제를 상언해 해결한 김이수의 사례도 있다. 둘째, 근검정신으로 애민을 실천했다. 즉위 6일째 되던 날부터 하루에 두 끼 식사와 다섯 가지 반찬을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왕실 재정을 절약했고, 비단옷보다 무명옷을 기워 입는 등 근검을 실천했다.  

이밖에도 무과 및 문과시험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게 했고, 서얼출신의 벼슬 참여와 노비제도 철폐를 추진했다. 그리고 훈민정음 사용을 확대하여 많은 백성들이 정보를 알게 하는 등 애민정치를 개혁적으로 시행했다.  

다산은 정조보다 10살 아래다. 둘의 만남은 다산이 22세 때 초시에 합격하고 임금을 알현하는 선정전(宣政殿)에서 이루어졌다. 다산의 답안이 특별하다고 여긴 정조가 “고개를 들라,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고 “임오생입니다.”라고 답하자 정조는 충격을 받았다. 임오년에 별세하신 부친께서 귀한 인재를 보내주신 것으로 착각한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정조는 성균관 유생인 다산을 6년 동안 특별한 관심으로 지도했고, 다산은 28세에 대과급제 후 11년 동안 여러 직위에서 정조를 보필했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런 서거(逝去)는 다산에게도 유배형 등 큰 고난이 닥쳐왔다. 그러나 “이제야 학문할 겨를을 얻었구나(今得暇矣)”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학문연구에 매진한 결과 ‘오교[孝弟慈]’에 기초한 다산학(茶山學)을 이뤄낼 수 있었고, 61세 때 자신이 지은 ‘사암(俟菴)’이라는 아호에는 ‘정조를 기다린다.’는 뜻을 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의 관계를 ‘풍운지회(風雲之會), ‘수어지계(水魚之係)’ 등으로 표현하고, 위당 정인보는 “정조가 없이는 정약용이 존재할 수 없고, 정약용이 없이는 정조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목민리더십은 牧(리더)이 民(파로어)을 이끌어가는 과정이다. 이는 마치 양떼를 돌보며 푸른 초원으로 안내하는 목동(牧童)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조의 ‘효심정치’는 ‘목민리더십’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는 “그 가르침이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고 그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지는데, 이는 리더(선왕)의 (효)가르침을 통해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다고 본 때문이다(其敎不肅而成 其政不嚴而治 先王見敎之可以化民也).”라는 『효경』의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2021/09/21]   다산의 저술에 나타난 목민정신  

 

 [2021/09/17]   정약용의 목민리더십과 ‘3호(好)’ 정신  

리더 자신부터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상호간 예의를다함으로써

-가족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

-가정윤리()/ 사회윤리()/ 국가윤리()를 구현하는 리더십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문화에 바탕을 둔 리더십

붉은악마」응원깃발에 새겨진 배달국의 제14대 임금이신 치우천황(B.C2707)시대의 도의원리(道義原理)에 뿌리를두고, 고조선의 제 3대단군이신 ′가륵′임금(B.C2150)의 중일사상(中一思想)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 임

-: 임금은 마땅히의로와야하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해야 한다

-: 부모는 마땅히 자비로와야하고 자식은 마땅히 효도해야한다

-: 부부간에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한다

   (爲君當義爲臣當忠/ 爲父當慈爲子當孝/ 爲夫婦當相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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